이 글은 정답이 없는 영역에서 AI가 사람을 덜 확신하게 만드는 배움을 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따라가는 연재 책의 세 번째 장이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모럴 미러(Moral Mirror)라고 부른다. 지난 장에서는 이 직관에 형태를 주려고 앉았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빼는 결정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트롤리 하나로 좁히고, 구독과 유형화와 K-12와 전문 윤리를 덜어냈다. 빼기가 윤곽을 만든다고 적었다.
그런데 윤곽이 생기고 나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손에 남은 이것을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정답을 가르치는 교육 앱도 아니고, 사람을 붙드는 동반자 앱도 아니고, 성격을 유형화하는 검사도 아니었다. 어느 칸에 넣어도 한쪽이 비어져 나왔다.
이 장은 그 빈자리를 발견한 기록이고, 동시에 그 빈자리가 기회인지 아니면 그냥 아무도 안 만든 데는 이유가 있는 함정인지를 따져본 기록이다. 미리 말해두면 결론은 깔끔하지 않다.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었는데, 그 기울어짐을 끝까지 증명하지는 못했다. 그 어정쩡한 상태까지가 이 장이다.
AI가 다 바꾼다더니
빈자리 이야기를 하려면, 내가 이걸 왜 굳이 교육 쪽에서 찾고 있었는지부터 말해야 한다. 그 뒤에는 한동안 나를 따라다닌 답답함이 있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AI는 사람이 일하는 방식, 접근하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는 물건인데, 그 포텐셜에 비하면 아직 별로 못 바꾸고 있다. 도구는 한결 강력해졌는데, 그 강력함이 닿는 자리는 대개 이미 있던 일을 조금 빠르게, 조금 싸게 하는 데 머문다. 보고서를 더 빨리 쓰고, 코드를 더 빨리 짜고, 그림을 더 빨리 그린다. 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라면, 우리는 새 엔진을 마차에 얹고 마차를 조금 빨리 굴리고 있는 셈이다. 엔진이 바꿀 수 있는 건 마차의 속도가 아니라 탈것의 형태인데도.
교육에서 이 답답함은 더 도드라진다. 지난 몇 년간 나온 학습 도구의 상당수는 같은 골격을 공유한다. 강의를 요약해주고, 문제를 자동으로 만들어주고, 틀린 곳을 짚어준다. 다 유용하다. 그런데 그 유용함은 기존 학습의 속도를 올리는 쪽이지, 학습이라는 것 자체를 다른 모양으로 바꾸는 쪽은 아니다. 객관식을 더 빨리 풀게 도와주는 도구는 많아도, 객관식이라는 형식 자체가 사라진 배움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엔진은 새것인데 여전히 마차를 끌고 있었다.
그 답답함을 품고 둘러보다가, 자연스럽게 배움이라는 영역에 눈이 더 깊이 갔다. 사람이 무언가를 익히고 자기 생각을 바꾸는 과정만큼, AI가 정말로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자리가 또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찾아봤다. 이런 종류의 배움을 누가 이미 하고 있나. 정답이 없는 영역에서, 사람이 자기 생각의 약한 곳을 스스로 보게 만드는 그런 것을. 찾을수록 또렷해진 건, 있어야 할 자리에 그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비슷한 걸 한다는 제품은 많았는데, 막상 들여다보면 내가 떠올린 그것과는 어딘가 달랐다. 그 어긋남이 이 장의 출발점이다.
교육 칸에 넣어보려 했다
처음엔 당연히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배우는 일을 돕는 거니까, 에듀테크(edtech, 교육 기술) 어딘가에 들어가겠지 싶었다. 그래서 그 칸에 넣어보려 했다.
그런데 넣자마자 한쪽이 비어져 나왔다. 우리가 보통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가운데에는 정답이 있다. 수학 문제에는 답이 있고, 영어 단어에는 뜻이 있고, 역사에는 연도가 있다. 교육은 대개 그 정답을 얼마나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머릿속에 옮기느냐의 게임이다. 개념을 배우고, 익히고, 외우고, 시험으로 확인한다. 좋은 에듀테크는 이 과정을 더 빠르고 더 개인화되게 만든다. 내가 어디서 틀렸는지 짚어주고, 약한 단원을 더 연습시킨다. 측정할 수 있는 목표가 있으니 잘 만들었는지 아닌지도 가릴 수 있다.
그런데 모럴 미러가 하려는 건 그 게임이 아니었다. 트롤리에는 외울 정답이 없다. 여기서 잘한다는 건 무언가를 더 많이 맞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옳다고 믿던 자리에서 흔들리는 것이다. 더 확신하게 되는 게 아니라 덜 확신하게 되는 것. 그러니 “정답을 효율적으로 옮긴다”는 교육의 한가운데 정의와는 방향이 어긋났다. 성공의 지표부터가 반대였다. 한쪽은 더 많이 맞히고 더 확신하게 만드는 걸 잘함으로 치고, 다른 쪽은 덜 확신하게 만드는 걸 잘함으로 친다.
이 어긋남은 측정의 문제로도 번진다. 에듀테크가 잘 작동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잘했는지를 숫자로 잴 수 있다는 데 있다. 정답률이 올랐는가, 다음 단원으로 넘어갔는가, 시험 점수가 좋아졌는가. 이 숫자가 있으니 A안과 B안을 비교하고, 더 나은 쪽으로 제품을 다듬을 수 있다. 그런데 “덜 확신하게 됐는가”는 그렇게 재기가 어렵다. 사람이 자기 입장의 약한 곳을 봤다는 걸 무슨 점수로 잡을 것인가. 잘못 재면 오히려 위험하다. 사용자가 만족했는지, 다시 왔는지를 지표로 삼으면, 2화에서 적었듯 불편한 진실보다 듣기 좋은 위로를 주는 쪽으로 제품이 미끄러진다. 측정이 쉬운 칸과 측정이 어려운 칸은 애초에 다른 종류의 물건이고, 에듀테크의 도구 상자는 측정이 쉬운 칸에 맞춰 만들어져 있었다.
리서치를 하면 할수록 이 어긋남이 커졌다. 비슷해 보이는 학습 앱들을 들여다봐도, 결국은 어딘가에 정답표를 두고 그쪽으로 사람을 데려가고 있었다. 표현은 “맞춤형 학습”이고 “소크라테스식 튜터”였지만, 안을 열어보면 미리 정해둔 결론으로 학습자를 부드럽게 유도하는 구조였다. 교육이라는 칸은 가장 가까운 칸이긴 했는데, 정작 그 칸의 중심에 박힌 정답이라는 못이 내 것에는 없었다. 못이 없으니 그 칸에 걸리지가 않았다.
그런데 하버드에서 하던 게 바로 이건데
여기서 멈칫했다. 교육이 아니라고 하기엔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샌델의 강의실에서 일어나던 일도, 따지고 보면 똑같은 것이었다.
마이클 샌델이 하버드 캠퍼스에서 하던 것을 떠올려 보자. 그는 학생에게 정답을 외우게 하지 않는다. 트롤리를 던지고, 학생이 답하면 그 답의 약한 곳을 찌르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학생은 자기 안의 모순에 걸려 넘어지고, 강의실을 나설 때 들어올 때보다 덜 확신하게 된다. 시험도 없고 정답표도 없다. 그런데 누구도 그걸 두고 “그건 교육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건 교육의 가장 오래되고 깊은 형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광장에서 상대의 말을 되받아 되묻던 그 문답법의 직계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이걸 배움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니까 내가 만들려는 건 새로 발명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이미 수천 년 된 교육인데, 지금의 카테고리 지도에 그 칸만 비어 있는 것뿐이었다. 정답을 옮기는 교육은 칸이 빼곡한데, 사람을 흔드는 교육은 제품의 지도에서 이름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하버드 강의실에서는 멀쩡히 일어나는 일이, 앱과 서비스의 세계에서는 부를 이름조차 없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앞두고도 광장에서 멈추지 않은 게 바로 이 문답이었고, 중세 대학의 디스푸타티오(disputatio, 정해진 주제를 두고 찬반을 오가며 따지던 토론 형식)도, 로스쿨의 소크라테스식 문답도 다 이 계보다. 사람을 흔들어 스스로 모순을 보게 하는 배움은 교육의 변방이 아니라 가장 깊은 본류였다. 그런데도 이게 디지털 제품으로는 옮겨지지 못한 채, 강의실과 세미나실이라는 오프라인의 비싼 공간에만 남아 있었다. 좋은 토론식 수업을 들으려면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말은, 뒤집으면 그 배움이 한 번도 규모 있게 풀린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깨달음이 빈자리의 성격을 바꿨다. 빈자리는 거기 있을 게 없어서 빈 게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이 빠져 있어서 빈 자리였다. 이 차이가 중요했다. 아무도 안 만든 낯선 신영역이라면 “그게 정말 필요한가”부터 의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이미 수천 년간 가치를 증명해 온 것이, 어쩐 일인지 제품으로만 옮겨지지 못한 영역이었다. 필요 여부는 이미 답이 나와 있고, 남은 질문은 “왜 그동안 옮겨지지 못했나”였다. 그 질문을 따라가자 답답함의 정체가 드러났다.
에듀테크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그러면 왜 옮겨지지 못했을까. 처음엔 에듀테크가 쉬운 길, 그러니까 정답 있는 영역만 골라 간 거라고 생각할 뻔했다. 그런데 그건 공정한 진단이 아니었다. 남을 게으르다고 부르는 진단은 대개 내가 못 본 제약을 가린다.
샌델식 강의실을 제품으로 옮기려면 한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학생이 방금 한 말에 맞춰 다음 질문을 그 자리에서 새로 만들어내는 것. 1화에서 길게 적은 그 일이다. 그런데 이건 얼마 전까지 기술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나리오를 사람마다 다르게, 매 순간 새로 생성하는 건 사람 진행자를 1:1로 붙여야만 가능했고, 그건 규모가 안 나왔다. 샌델 한 명이 전 세계 학습자를 일일이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교육 제품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사실상 하나였다. 미리 만들어 둔 콘텐츠를 잘 정리하고, 학습자를 몇 개의 유형으로 묶고, 정규화된 경로를 따라가게 하는 것. 개인화라고 부르던 것조차, 실은 미리 짜둔 분기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일이었다. 이건 게으름이 아니라 제약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정답 있는 영역으로 간 것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수학은 미리 만든 문제은행과 정답표로도 꽤 잘 가르쳐지니까. 정규화가 통하는 자리에서 정규화를 쓴 것이다.
문제는 정답 없는 영역에서는 그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람마다 다른 약한 곳을 그 자리에서 찌르지 못하면, 그건 샌델의 강의실이 아니라 그냥 윤리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는 일이 된다. 정규화하는 순간 핵심이 죽는다. 그래서 그 자리는 비워질 수밖에 없었다. 빈자리를 만든 건 누군가의 무관심이 아니라, 모두를 똑같이 묶어두던 그 벽이었다. 한 사람에게 맞춘 것을 백만 명에게 따로 만들어 줄 수 없다는, 1화에서 세그먼트와 VR을 이야기하며 적은 바로 그 벽.
그리고 1화의 결론이 여기서 다시 걸린다. 그 벽이 무너졌다. 한 사람에게 맞춘 추론을 매 순간 생성하는 단가가 거의 0으로 떨어졌다. 그러니 이 빈자리는 영원히 빌 자리가 아니라, 벽이 무너지면서 비로소 채울 수 있게 된 자리였다. 지도에 칸이 없던 건 그 칸이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그동안 그 칸을 채울 도구가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구가 생긴 지금, 칸을 그리는 일이 처음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빈자리를 봤을 때 나는 설렜다
여기까지 오자 솔직히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어디에도 안 맞는다는 걸, 아무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내가 느낀 건 불안이 아니라 설렘이었다.
생각이 곧장 그쪽으로 갔다. 아, 그럼 빨리 해볼까. 내가 이걸 만들어서 써보고 싶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좀 개인적인 마음이 있었다. 나도 이걸로 조금 더 공부하고 싶다. 트롤리 앞에서 흔들리는 경험을, 다른 누구보다 내가 먼저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만드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첫 번째 사용자이고 싶은 마음. 솔직히 이건 사업적 판단보다 앞선 충동이었다. 시장이 있는지, 돈이 되는지를 따지기 전에, 이게 있으면 내가 쓰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왔다.
빈자리를 본 사람의 반응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여기 왜 비어 있지, 위험한 거 아닌가”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 비어 있네, 내가 들어가 볼까”다. 나는 두 번째였다. 이 설렘 자체가 나에 대해 말해주는 것도 있다. 나는 이미 정의된 칸 안에서 더 잘하는 일보다, 칸이 없는 자리에서 칸을 만드는 일에 끌린다. 그게 내 기질이다.
다만 기질은 자산이면서 동시에 함정이기도 하다. 설렘이 판단을 흐리게 두면, 비어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신호를 못 본 채로 뛰어들게 된다. 새 카테고리를 만들었다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시장이 없던 자리였던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설레는 것과는 별개로, 이 빈자리가 진짜 기회인지 함정인지를 한 번 더 차갑게 따져봐야 했다. 설렘을 믿되, 설렘만 믿지는 않기로 했다.
빈자리는 기회인가 함정인가
빈 시장은 두 얼굴을 가진다. 아무도 없다는 건 경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돈을 못 벌었거나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첫 번째라면 기회고, 두 번째라면 함정이다. 둘은 멀리서 보면 똑같이 텅 빈 자리로 보인다. 그래서 빈자리 앞에서 해야 할 일은 들어갈지 말지를 정하는 게 아니라, 왜 비어 있는지를 먼저 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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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chart TD
E[카테고리 지도의 빈자리] --> Q{왜 비어 있나}
Q -->|아무도 원하지 않아서| T[수요가 없는 함정]
Q -->|만들 수가 없어서| O[공급이 막혔던 기회]
O --> W[그 벽이 무너졌나]
W -->|무너짐 = 추론 시점 생성| Y[지금은 채울 수 있는 자리]
W -->|그대로| N[아직은 빈 채로]
나는 빈 이유를 이렇게 나눠 보려 했다. 어떤 자리는 수요가 없어서 비어 있다. 사람들이 그걸 원하지 않으니 만들어도 안 팔린다. 어떤 자리는 지금까지 만들 수가 없어서 비어 있다. 수요는 있는데 공급할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앞 장에서 정리한 게 바로 두 번째였다. 사람을 흔드는 1:1 교육에 대한 수요는 또렷이 있었다. 사람들은 샌델의 강의를 수천만 번 돌려봤고, 술자리에서 트롤리를 이야기하고, 자기가 일관된 사람인지 궁금해한다. 없었던 건 수요가 아니라, 그 수요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춰 채워줄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이 빈자리는 함정보다는 기회 쪽에 가깝다는 게 내 잠정적인 결론이었다.
함정 쪽 경고도 진지하게 들여다봤다. 새 카테고리를 만들었다고 믿었다가 사라진 제품은 무덤을 이룰 만큼 많다. 멋진 아이디어처럼 보였는데 정작 그 자리에 서겠다는 사람이 없던 경우들. 그런 함정과 진짜 기회를 가르는 건 결국 “비어 있던 이유가 무엇이냐”였다. 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비었다면 도구가 아무리 좋아져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트롤리를 둘러싼 신호는 수요 부재 쪽이 아니었다. 정의를 다루는 한 공개 강의가 전 세계에서 수천만 회 재생됐고, 사람들은 친구와 트롤리를 놓고 다투고, 자기가 어떤 상황에서 입장을 바꾸는지 궁금해한다. 흔들리는 경험을 향한 허기는 곳곳에 있었다. 다만 그 허기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춰 채워줄 공급이 없었을 뿐이다.
다만 여기에는 정직하게 남겨둘 빈틈이 있다. 사람들이 원한다는 것과, 그걸 위해 지갑을 연다는 것은 다르다. 불편해지는 경험에 돈을 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샌델 강의를 즐겨 본다는 것과, 자기가 흔들리는 경험에 비용을 치른다는 것 사이에는 건너야 할 강이 있다. 무료로 보는 강의와 돈을 내고 받는 불편함은 다른 물건이다. 이건 2화에서 수익 모델을 이야기하며 한 번 건드렸고, 아직 답하지 못한 자리다.
그래서 지금 내 입장은 이렇다. 기회 쪽에 무게가 실려 있지만, 함정일 가능성을 지운 건 아니다. 빈자리를 기회로 만드는 건 그 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비어 있던 이유가 이제 사라졌다는 증명이다. 공급을 막던 벽이 무너졌다는 것까지는 보였는데, 수요가 지갑으로 이어진다는 건 아직 못 봤다. 증명의 절반만 손에 쥔 셈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의 두 얼굴
빈자리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고 나니, 곧바로 다음 문제가 따라왔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양날이었다.
한쪽 날은 이렇다. 이름이 없으면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게 뭐예요”라는 질문에 한 단어로 답할 수가 없다. 교육이라고 하면 정답을 가르치는 걸 떠올리고, 게임이라고 하면 가볍게 여기고, 심리 테스트라고 하면 유형 분류를 기대한다. 다 어긋난 기대다. 이름이 없는 물건은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기 쉽고, 잘못 불리면 잘못 쓰인다. 사용자가 정답을 기대하고 들어와 정답이 없는 걸 보면 실망하고, 가벼운 게임을 기대하고 들어와 자기가 흔들리는 걸 보면 당황한다. 이건 마케팅의 어려움이기 전에 경험 설계의 어려움이다.
다른 쪽 날은, 바로 그 이름 없음이 해자(moat, 경쟁자가 쉽게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어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무엇이라 부를지를 정하는 사람이, 그 자리의 규칙도 정하게 된다. 카테고리를 새로 여는 일은 어렵지만, 한번 열고 그 이름이 받아들여지면 뒤따라오는 사람들은 내가 그린 지도 위에서 움직이게 된다. 사람들이 “아, 그거 OO 같은 거”라고 말할 때의 그 OO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건 기능 한두 개로는 따라잡히지 않는 종류의 우위다.
그래서 빈자리의 위험과 빈자리의 기회는 사실 같은 한 가지, 아직 이름이 없다는 사실에서 동시에 나온다. 같은 뿌리에서 부담과 해자가 같이 자란다. 그렇다면 다음 숙제는 또렷해진다. 이 자리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 그 이름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약속하고 무엇을 오해하게 만들 것인가. 이름을 잘 붙이면 부담이 해자로 넘어가고, 잘못 붙이면 해자가 부담으로 주저앉는다.
이 글이 답하지 못한 것
3화는 빈자리를 발견하고, 그게 함정보다 기회에 가깝다고 잠정 결론 낸 기록이다. 그런데 잠정이라는 단어를 그냥 붙인 게 아니다. 답하지 못한 게 둘 남았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그것이다. 원한다와 지갑을 연다 사이의 강을 나는 아직 못 건넜다. 빈 이유가 사라졌다는 건 공급 쪽 이야기고, 수요 쪽에서 사람들이 불편한 배움에 실제로 값을 치를지는 여전히 열린 질문이다. 이건 책상에서 결론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만들어서 사람들 앞에 놓아봐야 알 수 있는 종류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이 결론은 잠정으로 둔다.
다른 하나는 더 구체적이다. 나는 이 장에서 어디에도 안 맞는다고 반복해 말했는데, 정작 어디와 어떻게 다른지를 아직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가장 비슷해 보이는 것들, 이를테면 정답 있는 영역에 AI를 얹은 학습 도구들, 사람과 정서적으로 얽히는 동반자 앱들, 가볍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학습 서비스들. 이것들과 내 것이 한 칸에 안 들어간다는 건 느낌으로는 알겠는데, 그 느낌을 조목조목 뜯어 보여주지 않으면 “그거 결국 OO 아니야”라는 한마디에 답할 수가 없다.
다음 장에서는 바로 그 비교를 한다. 가장 가까워 보이는 셋을 나란히 놓고, 내 것이 어느 지점에서 그것들과 갈라지는지를 하나씩 짚어볼 생각이다. 빈자리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 그 자리가 정말 비어 있는지부터 옆 칸들과 견줘 확인하는 일이다. 빈자리라고 믿었는데 옆 칸이 이미 반쯤 차지하고 있던 자리라면, 이 책의 한 축이 통째로 흔들리니까. 다음 장은 그 점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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